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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의전은 조선시대 서울 종로에 자리 잡고 있던 여섯 종류의 어용(御用)상점을 말한다. 육의전은 선전(線廛: 비단 상점), 면포전(綿布廛: 무명 상점), 면주전(綿紬廛: 명주 상점), 지전(紙廛: 종이 상점), 저포전(苧布廛: 모시ㆍ베 상점), 내외어물전(內外魚物廛: 생선 상점)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나 육의전은 국역 부담 능력에 의해 특권화된 시전으로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관청에 관한 부담 능력과 정부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상업능력의 보유에 따라 변화되었다.
첫째, 조선 초기 조성된 시전행랑은 자연층을 기반으로 3~5층의 다짐층을 조성하여 건립한 것으로 보여진다. 태종연간 한성부를 건설하면서 국가적 사업의 하나로 도성내 주요 도로변으로 건설된 ‘행랑’은 면밀한 계획하에서 대규모 지반개량을 실시한 후 조성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둘째, 조사지역에서는 조선 전기 유구로 판단되는 2개층의 시전행랑 유구가 2007과 2008년에 걸쳐 조사되었다. 2개층의 시전행랑은 동일한 규모이고 내부 공간의 분할도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초석 하부의 잡석지정은 상부지름이 약 1m이고 깊어도 1.0~1.2m 내외로 깊으며 할석들을 정연하게 돌려 쌓은 형태이다. 이것으로 보아 도성 내의 가로의 선형과 폭을 유지시켰던 ‘행랑’은 조선 전기 동안은 거의 동일한 축과 규모를 유지했던 것으로 추청되며 지정 등 기초시설은 상당 부분 중복 · 재사용 된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2007년 조사된 1차 시전행랑은 2004년 조사된 ‘청진6지구 유적’의 제5문화층에서 노출된 시전행랑 유구의 연장선상의 동일한 유구로 판단된다. 이는 두 유적의 시전행랑 건물지가 두꺼운 소토층 하부에서 노출된 점, 탄화마루가 확인된 점, 규모가 거의 비슷하며 내부 공간이 온돌방과 마루, 온돌방과 토방이 반복되어 배치된 점 그리고 초석, 고막이, 지정의 형태, 출토유물의 양상 등이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넷째, 1차 시전행랑의 규모는 잔존상태가 양호한 정면 2칸을 기준으로 정면 2칸, 측면 1.5칸인데, 정면 2칸의 길이가 약 7.66m, 측면 1.5칸의 길이가 5.28m로 이것을 면적으로 환산하면 대략 40.44㎡(12.23평)이 된다. 각각의 주간거리는 정면 1칸의 길이가 각각 3.8m, 3.86m이며 측면의 전면 1칸이 3.4m, 후면 반 칸이 1.8m이다. 각각의 한 칸은 2개의 공간으로 구획되는데 고래의 흔적이 남아있는 온돌방은 약 1.45~1.5m 폭이며 마루와 토방은 약 2.35m폭으로 온돌방보다 다소 크다. 2008년에 조사된 2차 시전행랑과 ‘청진6지구 유적’에서 확인된 시전행랑의 규모도 이와 유사하다. 시전행랑을
이루는 개개 건물의 한 단위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온돌방과 마루, 온돌방과 토방으로 구분된 각각의 1칸을 기본으로 하여, 1개의 시전행랑을 이루기 위한 최소단위에 대한 연구는 추후 종로 일원의 발굴조사와 문헌 연구를 통해 확인될 것으로 기대된다.
다섯째, 1차 시전행랑에서 피맛길에 접한 북벽은 방화벽으로 두텁게 조성된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시전행랑 건물지 내부 탄화된 마루귀틀에서 시료를 채취하여 방사성 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1487년으로 나왔다. 이는 세종 8년(1426) 2월 도성의 대규모 화재 이후 “도성의 행랑에 방화장을 쌓으라”는 실록 기사와 부합된다고 볼 수 있다.

여섯째, 시전행랑 북측으로 피맛길가 건물지 하부에서 ‘목책’시설을 이용한 수로가 확인되었는데 시전행랑 방화장 북측 1m 지점부터 3차례에 걸쳐 조사지역 북측으로 이동하였다. 가장 후대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3번째 수로의 폭이 90cm 내외이며 ‘목책’은 대략 80cm 간격으로 말뚝을 박고 나뭇가지로 엮었으며 깊이는 대략 70cm 내외였다. 수로의 바닥면은 지푸라기 따위의 초본류로 마감한 것으로 판단된다. 수로의 ‘목책’과 관련된 층위 양상으로 보아
가장 먼저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목책’의 말뚝과 3차 수로의 바닥마감인 초본류를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 1차 수로로 추정되었던 말뚝은 출토유물 1422년(세종 4), 3차 수로로 추정된 초본류는 1436년(세종 18)으로 편년되었다.

세종 3년(1421) 도성의 대홍수 이후 도성 내 지류와 세류를 정비하면서 조사지역 일원에 흐르던 제생동천의 물길을 시전행랑 뒤편으로 동류하도록 하였다는 기록과 부합된다고 볼 수 있다. 제생동천 유구는 2009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조사한 ‘서울 종묘광장 인근유적 발굴조사’에서도 확인되었는데 목책시설의 형태, 토층의 양상 등이 금번 조사지역의 것과 거의 동일하다. 결론적으로 조사지역은 면적이 협소하고 지표로부터 2m이상의 깊이까지 지하 구조물과 철거 등의 과정에서 훼손되었으나 그 하부에서 조선 전기 2개 층의 시전행랑을 비롯하여 건물지, 도로(피맛길), 배수로, 수로 등의 유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특이할만한 유구로는 조선 초기 한성부 건설 과정에서 태종연간의 초측된 시전행랑(2차 시전행랑)과 그 상부에 방화장을 두어 세종연간 이후 조성된 것으로 판단되는 시전행랑(1차 시전행랑)이 확인되었다. 또한 시전행랑 뒤편으로 폭 3.4m 가량의 피맛길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맛길과 그 북측 건물지 하부로 동서방향의 목책시설을 한 수로도 확인되었는데 세조연간에 정비된 제생동천 혹은 그와 관련된 유구로 판단된다.